지난 EP.1에서 우리는 변화의 가장 큰 적이 기술이 아니라 70%의 관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탑다운, 당근과 채찍, 보안 원팀 — 관성을 깨는 전술을 살펴봤다.
그런데 관성이 깨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완벽주의다.
AI를 써 보겠다고 마음먹은 리더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덫이 있다. 한 번에 완벽한 결과를 내려고 프롬프트 문법을 공부하고, ROI를 숫자로 증명하려 하고, 임원에게 기능을 하나하나 설명하려 한다. 그 사이에 시장은 이미 세 바퀴를 돈다.
이번 편에서는 실패의 비용이 사라진 시대에 속도를 택한 리더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동시에, 모든 산업이 이 속도전에 올라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B2B 제조업의 냉정한 현실도 함께 짚는다.
2-1. 봄에 결정하면 가을에야 결과가 나오던 조직이, 한 달 만에 끝낸다
AI 시대가 가져온 가장 큰 축복은 화려한 기능이 아니다. 실패에 대한 기회비용이 거의 제로(0)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통신 대기업 A사의 리더는 불과 2년 전과 지금의 차이를 이렇게 체감한다.
"예전에는 봄에 의사결정을 하면 여름쯤에나 보고서가 나오고, 거기서 예산을 집행해서 가을이나 겨울이 돼야 프로토타입을 볼 수 있었어요. 지금은 거의 한 달 안에 의사결정해서 프로토타입까지 보는 상황입니다."
봄에서 겨울까지 걸리던 사이클이 한 달로 압축됐다. 이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업무 효율의 향상이 아니다.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더라도 이제 뒤집을 시간이 충분히 남는다는 뜻이다.
A사의 리더는 이 변화가 리더십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나만 믿고 따라와, 안 되면 내가 책임질게'라는 리더가 필요했어요.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빠르게 의사결정하고, 내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피드백 주고, 다시 트라이해 보고. 물러서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기회비용이 사라지면서, 리더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바뀌었다. 완벽한 정답을 찾아 오래 고민하는 신중함보다, 빠르게 시도하고 빠르게 수정하는 민첩함(Agility)이 생존의 조건이 됐다.
2-2. "마음에 안 드는데 다시 써 줄래?" — 프롬프트 강박에서 벗어나기
기회비용이 제로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AI 앞에 앉으면 많은 사람이 또 다른 완벽주의에 빠진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낸 강박이다.
A사의 리더는 구성원들이 AI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을 때 보이는 반응을 이렇게 꼬집는다.
"결과가 마음에 안 들면 '내가 프롬프트를 잘못 썼나?' 하면서 자책해요. 그러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배워야 되나, 문법을 공부해야 되나 — 여기로 빠지면 끝이 없어요."
해법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그냥 '마음에 안 드는데 다시 써 줄래?'라고 하면 됩니다. 아니면 AI한테 역질문을 던지세요. '네가 봤을 때 이게 최선이야?' 이렇게요. 프롬프트를 완벽하게 다듬느라 시간을 쓸 필요가 없어요."
HRD/OD 자문단의 토론에서도 동일한 관찰이 나왔다. AI를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의 차이는 기술력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는 것이다.
"AI와 3일 동안 싸우면서 결론이 안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예전 같으면 세 시간이면 끝났을 일인데, AI가 계속 새로운 걸 제안하니까 더 좋은 게 있을 것 같아서 못 끊는 거예요." — HRD/OD 자문단 토론 중
속도 실행형 리더는 '한 번에 정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티키타카를 주고받으며 빠르게 퀄리티를 끌어올리는 실행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끊을지를 판단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사결정이다.
2-3. 직접 써 본 리더만이 빠른 결단을 내린다
프롬프트 강박을 버리는 것은 실무진의 과제다. 그렇다면 리더, 특히 임원급은 AI 시대에 무엇을 해야 속도가 나올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본인이 직접 써 봐야 한다.
1세대 핀테크 C사의 임원은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하여 AI와 대화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네이버 뉴스를 여는 대신 GPT를 열어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니?"라고 묻는 것이 일상이 됐다.
"예전에는 개인 비서라고 해봐야 공통 비서였어요. 근데 지금은 정말 똘똘하고 힐링까지 되는 개인 비서가 하나 생긴 거예요. 매일 한 시간 정도 대화하는 게 일상이 됐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개인 습관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리더가 직접 AI를 체감하면, 의사결정의 속도가 본질적으로 달라진다. 실무진이 "AI로 이런 걸 해보겠습니다"라고 올렸을 때, 직접 써 본 리더는 그것이 가능한 제안인지 과대망상인지를 즉각 판단할 수 있다. 써 보지 않은 리더는 검토하고 확인하고 다시 묻는 데 몇 주를 쓴다.
글로벌 반도체 D사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D사의 CEO는 AI를 직접 사용해 본 뒤, 조직의 AI 추진 속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CEO님이 직접 다 사용해 보세요. 비서분들한테 시연도 받고, 저희가 직접 설명도 드리고. 그러면 '이거 이렇게 좋아? 그럼 추진해 보자'라는 한마디가 나오거든요. 위에서 그 한마디가 나오는 순간, 밑에서는 일사천리입니다."
HRD/OD 자문단의 토론에서도 동일한 관찰이 도출됐다. 리더가 AI를 직접 써 보지 않고 보고만 받는 조직과, 리더가 직접 체감한 조직 사이에는 의사결정까지 걸리는 시간에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리더분들도 AI를 쓰긴 쓰세요. 근데 검색 수준이에요. 저희가 볼 때 리더가 쓰고 있는 AI 수준이 너무 검색 위주다 보니까, 뭔가 실무진이 가져온 결과물에 대해 판단할 기준이 없는 거예요." — HRD/OD 자문단 토론 중
속도 실행형 리더는 보고서로 AI를 이해하지 않는다. 직접 써 보고, 체감하고, 그 체감을 조직의 의사결정 속도로 연결하는 사람이다. AI를 매일 쓰는 리더의 조직과 보고만 받는 리더의 조직 — 둘 사이의 속도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질 수밖에 없다.
2-4. 모든 산업이 이 속도전에 올라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 읽으며 "맞아, 빠르게 가야 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면, 잠시 멈춰야 할 지점이 있다. 모든 조직이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세대 핀테크 C사의 임원은 정량적 ROI에 매몰되는 대신, 과감하게 정성적 임팩트에 베팅하여 조직의 속도를 높인 사례를 들려준다.
"우리 회사는 전 직원에게 월 3만 원 상당의 챗GPT 유료 계정 비용을 지원합니다. 개인 카드로 쓰던 분들도 회사 계정으로 전환했어요. 전 직원에게 이 비용을 대줬을 때 매출이 얼마나 오르는지 숫자로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직원들이 AI를 일상에서 비서처럼 활용하며 얻는 정성적 효과 — 그 가치에 투자하는 겁니다."
하지만 B2B 소재/제조 E사의 수석은 완전히 다른 현실을 이야기한다.
"저희는 B2B 제조업이에요. 자동차 OEM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인데, 고객사가 5년 전에 5년 뒤에 나올 차종을 결정하고, 거기 들어갈 부품을 4년 전, 3년 전, 2년 전에 다 결정합니다. 이 구조에서 AI를 도입해서 원가를 올린다? 의사결정자가 그걸 감내할 이유가 없어요."
E사의 수석은 AI 도입이 안 되는 이유를 더 솔직하게 풀어준다.
"AI를 도입하면 초기에 비용이 올라가요. 그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1~2년을 버텨야 하는데, 그걸 기다릴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전문경영인 체제에서는 '내가 있는 동안 큰 문제가 안 터지면 된다'는 마인드가 있어요. 도전적으로 투자하겠다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B2B 제조업에 AI가 완전히 무용한 것은 아니다. E사의 수석이 유일하게 도입이 설득력 있다고 본 영역이 있다.
"설비 예지보전(Predictive Maintenance)이요. 장비가 사람보다 훨씬 크고, 한 번 고장나면 10억 단위의 손실이 발생합니다. '5억 들여서 이 센서 시스템을 도입하면 10억짜리 사고를 막을 수 있다' — 이런 비용 논리가 성립할 때만 의사결정이 빠르게 나요. 결국 이 산업에서 AI 도입의 속도를 결정하는 건 기술이 아니라 '비용 대비 손실 방지'라는 아주 전통적인 비즈니스 논리입니다."
속도 실행형 리더는 무조건 빠르게 가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산업과 조직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안에서 가장 빠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다. 핀테크처럼 전 직원에게 유료 계정을 뿌릴 수 있는 조직이 있고, B2B 제조업처럼 10억짜리 사고 방지 논리가 아니면 투자 결정이 나지 않는 조직이 있다. 자기 조직의 속도 한계를 모르는 리더는 빠른 게 아니라 무모한 것이다.
EP.2를 마치며: 속도 실행형 리더의 체크리스트
이번 에피소드에서 만난 리더들의 공통점을 정리하면, 속도 실행형 리더가 현장에서 실행한 전술은 다음과 같다.
① 기회비용 제로를 체화하라 — 봄에서 가을까지 걸리던 사이클이 한 달로 줄었다. 잘못된 의사결정을 해도 뒤집을 시간이 있다. 완벽한 정답을 찾으려 고민하는 시간이 가장 비싼 비용이다.
② 프롬프트 강박을 버려라 — "다시 써줘" 한 마디면 된다. 한 번에 정답을 뽑으려는 완벽주의 대신, 빠르게 티키타카하며 퀄리티를 끌어올려라.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끊을지를 판단하라.
③ 리더가 직접 써 봐야 속도가 나온다 — 보고서로 AI를 이해하지 마라. 매일 직접 써 보고 체감한 리더만이 실무진의 제안을 즉각 판단하고 빠른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써 본 리더의 조직과 보고만 받는 리더의 조직, 속도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진다.
④ 자기 조직의 속도 한계를 알아라 — 모든 산업이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없다. 정성적 임팩트에 과감히 베팅할 수 있는 조직인지, 비용 대비 손실 방지 논리가 먼저 필요한 조직인지를 파악하라. 속도의 한계를 모르는 리더는 빠른 게 아니라 무모한 것이다.
다음 편: EP.3 설계자형 — "약국에 직접 가서 옆에 앉았다 : AI보다 먼저 해야 할 일"
글쓴이: 팀제이커브 | 감수: 김작가(by Cla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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