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에서는 70%의 관성을 깨는 전술을, EP.2에서는 완벽주의를 버리고 속도를 택하는 리더의 태도를 다뤘다. 관성을 깨고, 속도도 올렸다. 그다음은?
설계다.
AI를 도입하겠다고 결심한 조직에서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실수가 있다. "AI로 뭘 할 수 있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기술의 가능성에 먼저 눈이 가면, 정작 우리 조직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는 뒷전이 된다. 화려한 솔루션을 도입했는데 아무도 안 쓰는 상황, 수백 건의 과제가 올라왔는데 의미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상황 — 모두 설계 없이 기술부터 들이민 결과다.
이번 편에서는 AI를 쓰기 전에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그리고 업무를 해체하고 사람과 AI에게 재조립하는 '설계자형 리더'의 역할을 파헤친다.
3-1. 정답 자판기의 종말: "이걸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가 사라진 시대
과거의 조직에서 리더는 가장 경험이 많고 직무 전문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팀원들이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과거의 성공 방정식을 바탕으로 정답을 내어주는 '정답 자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하지만 AI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통신 대기업 A사에서 해커톤 이후 사내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에이전트 중 하나는, 놀랍게도 아주 단순한 것이다. 법인카드 컴플라이언스 챗봇. "이 선물을 법인카드로 사도 되나요?", "주말에 법인카드 써도 되나요?" — 과거에는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이걸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부터가 업무였다. 담당자를 찾고, 전화하고, 기다리고. 그 '적임자를 찾는 과정' 자체가 시간이었다.
이제 에이전트가 사내 컴플라이언스 규정을 학습하고 즉시 답변한다. 정보 접근성이 제로에 수렴한 것이다.
"예전에는 '이걸 아는 사람'이 리더였어요. 그 사람한테 물어봐야 답이 나오니까. 근데 지금은 에이전트가 규정을 다 알고 있어요. '아는 것'의 가치가 떨어진 거죠." — A사 리더
HRD/OD 자문단의 토론에서도 동일한 관찰이 나왔다. 입사 3년 차도 안 된 주니어가 AI의 도움으로 시니어급 보고 자료를 만들어내는 시대. 리더가 가진 '경험의 프리미엄'이 빠르게 상향 평준화되고 있다.
"솔직히 무슨 뜻인지 제대로 모르는데 만들어내는 속도는 엄청 빨라요, 저보다. 근데 제 위에 있는 상무님은 그걸 좋아하세요. 고민 없이 빨리 찍어내는 애들을." — HRD/OD 자문단 토론 중
그렇다면 리더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정답을 아는 것이 더 이상 무기가 되지 않는 시대에, 리더는 상향 평준화된 팀원들과 AI 에이전트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엮어내고, 불확실성 속에서 구조를 설계하는 '아키텍트(Architect)'로 진화해야 한다.
3-2. AI의 패러독스를 통제하라: 방향, 가치, 책임 — 설계의 3가지 축
설계자형 리더가 갖춰야 할 첫 번째 역량은 기술의 환상에서 벗어나 AI의 명확한 한계를 인지하는 것이다.
1세대 핀테크 C사의 임원은 보수적 대기업에서 디지털 트윈 TF가 혁신을 추진하는 과정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며 중요한 인사이트를 얻었다. 그 TF에 투입된 신규 인재들의 사고방식은 기존 조직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대부분 AI를 도입할 때는 'AI가 어디까지 우리를 지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 TF 인원들은 정반대였어요. AI가 가진 한계점과 패러독스를 먼저 고민하더라고요."
이 패러독스의 핵심은 단순하다. AI는 훌륭한 판단을 내리지만, 그 판단에 대한 책임은 절대 지지 않는다. AI가 "이렇게 하세요"라고 제안했는데 결과가 틀어지면, 그 책임은 오롯이 사람의 몫이다.
따라서 설계자형 리더는 AI의 '사용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스템을 통제하는 아키텍트로서 세 가지 축을 직접 설계해야 한다.
첫째, 방향 설정. AI가 어느 쪽을 향해 작동할 것인지, 비즈니스의 방향성을 명확히 한다.
둘째, 가치 기준 정립. AI가 도출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가이드라인을 부여한다. 비용 절감이 목적인지, 품질 향상이 목적인지, 설계 정확도를 높이는 것이 목적인지 — 가치 기준이 명확해야 AI가 그쪽에 집중된 학습을 한다.
셋째, 책임 관리. AI가 내린 결론에 대해 어느 시점에 인간이 개입하여 검증할 것인지, 누가 승인할 것인지, 누가 중단 버튼을 누를 것인지, 최종적인 비즈니스 책임은 누가 질 것인지를 촘촘하게 세팅한다.
"그들이 하는 얘기가 '책임 구조 설계'라고 하더라고요. AI 시대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책임지는 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부분이 설계의 핵심이었습니다." — C사 임원
3-3. '무당 과제'를 걸러내는 자: AI 맹신 vs 현장 관찰
방향, 가치, 책임을 설계했다면, 다음으로 부딪히는 현실이 있다. AI 리터러시가 부족한 구성원들이 맹목적으로 AI를 도입하려는 태도다.
글로벌 반도체 D사의 리더는 전사 AI 확산을 추진하면서 수백 건의 AI 적용 과제를 접수받았다. 그중 상당수가 막연하게 "AI가 해결해 줄 거야"라고 기대하는, 이른바 '무당 과제'였다.
"'무당 과제'라고 부릅니다. 그냥 '얍!' 하면 다 되는 줄 알아요. AI를 하겠다고 막연하게 가져오는데, 실제로 인터뷰해 보면 본인들도 안 된다는 걸 알아요. 그걸 얘기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시도를 하려는 거예요."
D사의 리더는 이런 과제들을 걸러내기 위해 PI(Project Investigator) 역할을 자처했다. 현업 조직을 직접 돌면서 인터뷰하고, 중복 과제는 합치고, 실현 불가능한 것은 솔직하게 돌려보냈다. 때로는 AI가 아닌 단순 자동화(RPA)나 기존의 머신러닝으로 푸는 것이 더 효율적인 경우도 있었다.
"AI로 뭘 할 수 있을까에서 출발하면 못 찾을 거 같아요. 그냥 밤새도록 해도. 먼저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어떤 도구로 풀 것인가를 나중에 결정하는 거죠. 꼭 LLM이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그렇다면 문제를 제대로 정의한 사례는 어떤 모습일까?
제약 유통 B사의 리더는 정반대의 접근을 보여준다. 에이전틱 AI를 커머스 플랫폼에 도입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기술부터 들이밀지 않았다. 대신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 즉 현장 관찰 기법을 택했다. 약국에 직접 찾아가서 약사 옆에 앉아 주문하는 과정을 지켜본 것이다.
"처음에는 추천 알고리즘부터 시작하려고 했어요. 커머스니까 당연히 추천이 중요하잖아요. 근데 실제로 약국에 가서 보니까 이분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건 추천이 아니었어요. 공급사가 여러 군데인데 최소 주문금액을 맞추기 위해 장바구니를 수동으로 조합하는 작업 — 거기서 시간이 다 새고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관찰한 병목을 내부 로그 데이터로 검증했다. 실제로 그랬다. 그래서 에이전틱 AI의 첫 번째 기능은 화려한 추천 시스템이 아니라, 각 공급사별 최소 주문금액을 자동으로 맞춰서 최저가 장바구니를 조합해 주는 것이 됐다. 약사들이 진짜 시간을 쓰고 있던 바로 그 지점에 기술을 붙인 것이다.
D사의 '무당 과제'와 B사의 에스노그라피. 이 두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명확하다. 설계자형 리더는 AI를 어디에 쓸지를 먼저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조직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하는 사람이다. 문제가 정의되면, 도구의 선택은 그다음이다.
3-4. 해체와 재조립, 그리고 완벽한 위임: 모든 직원이 PM처럼 일하는 시대
문제를 정의했다면, 이제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 차례다. 설계자형 리더의 완성은 '업무의 해체와 재조립', 그리고 '위임'에서 이루어진다.
통신 대기업 A사의 리더는 AI 시대에 필요한 역량을 이렇게 요약한다.
"모든 직원이 PM처럼 일해야 돼요. 업무를 단계별로 나눌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한 자원을 찾아서 조합하고, 다시 하나의 결과물로 만들 수 있어야 해요. 예전에는 이런 걸 팀장이나 그 윗선만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에이전트가 공백을 메울 수 있으니까요."
이 말은 리더에게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팀원 한 명 한 명이 PM처럼 일할 수 있게 됐다면, 리더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직접 지시하고 확인하는 사람이 아니다. 거대한 업무를 해체하여 사람과 AI 에이전트에게 적절히 할당하고, 그 결과물을 다시 조립하는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A사의 해커톤에서 이 원리가 가장 생생하게 드러난 사례가 있다. 대리점 관리 업무를 하는 여직원 세 명이 참가했다. 코파일럿을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대회 당일 오전까지도 자포자기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뭘 하시려고 하냐고 물어봤어요. 대리점에 보내야 하는 이메일을 자동으로 보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내용은 똑같은데 대리점명, 사업자명, 대표명만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샘플 하나를 딱 보여 드렸어요. 엑셀에서 이름 컬럼 여기, 사업자 컬럼 여기 — 이것만 보여 드렸는데 그때부터 아이디어가 터지는 거예요."
이 세 명의 발표는 기술적으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발표 때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제 대리점 사장님한테 가게 이름 틀렸다고 혼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분들이 업무에 활용하고 계세요."
이것이 설계자형 리더가 하는 일이다. 직접 코드를 짜거나 에이전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자기 업무의 병목을 스스로 발견하고, AI로 해결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 두 시간의 교육과 샘플 하나 —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때 가장 경계해야 할 리더의 유형이 있다. 1세대 핀테크 C사의 임원은 단호하게 말한다.
"일을 아랫사람에게 내릴(위임할) 줄 모르는 리더는 매니저의 자격이 없습니다. 본인이 실력이 출중한 건 팀원 때 얘기지, 매니저가 해야 할 일은 일을 내리고, 그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겁니다."
제약 유통 B사의 리더도 같은 맥락에서, 위임의 전제 조건을 이렇게 짚는다.
"구성원 개개인의 AI 이해도와 업무 성향이 다 다릅니다. MD는 밖에 영업 나가는 시간이 많아서 책상에 못 붙어 있고, IT 담당자는 빠르게 흡수하고. 누구한테 어떤 에이전트가 붙었을 때 효과가 있는지 — 그걸 리더가 파악 못 하면 관리하기 쉽지 않아요."
설계자형 리더는 모든 것을 직접 하는 슈퍼맨이 아니다. 업무를 해체하고, 각 구성원의 역량과 성향에 맞게 사람과 AI에게 재조립하여 배분하고, 자신은 전체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하는 사람이다. 변화의 스피드가 무섭도록 빠른 시대에, 실무를 쥐고 놓지 못하는 리더 본인이 오히려 조직 전체의 속도를 갉아먹는 가장 큰 병목이 될 수 있다.
EP.3을 마치며: 설계자형 리더의 체크리스트
이번 에피소드에서 만난 리더들의 공통점을 정리하면, 설계자형 리더가 현장에서 실행한 전술은 다음과 같다.
① 정답 자판기에서 내려와라 — '아는 것'의 가치가 떨어진 시대, 리더의 존재 이유는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결과물들을 엮어내고 구조를 설계하는 데 있다.
② AI의 패러독스를 먼저 인지하라 — AI는 판단은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방향 설정, 가치 기준 정립, 책임 관리 — 이 세 가지 축을 리더가 직접 설계해야 한다.
③ 기술보다 문제를 먼저 정의하라 — "AI로 뭘 할 수 있지?"가 아니라 "우리의 진짜 병목이 어디지?"에서 출발하라. 현장에 가서 관찰하고, 데이터로 검증하고, 그 위에 도구를 붙여라. 무당 과제를 걸러내는 것도 리더의 역할이다.
④ 해체하고, 재조립하고, 위임하라 — 거대한 업무를 쪼개서 사람과 AI에게 적절히 배분하라. 구성원의 AI 이해도와 업무 성향까지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라. 실무를 쥐고 놓지 못하는 리더가 조직의 가장 큰 병목이다.
다음 편: EP.4 사고 확장형 — "AI한테 넋두리했더니 새 시장이 열렸다"
글쓴이: 팀제이커브 | 감수: 김작가(by Claude)
AI Native Partner로서 기업의 AI Native 전환을 돕고 있습니다. L&D(Learning & Development)부터 AX컨설팅, AI 코치 자산화까지 — 조직이 AI와 함께 일하는 방식을 설계합니다.